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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보다 강렬한 부치 레즈비언의 형상

2025년 8월 2일

문아영

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 ⓒ 영화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


영화 〈럭키, 아파트〉(2024)의 주인공 선우는 일자리를 잃은 후 다리까지 다치게 되면서 한동안 임금 노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이에 생활비는 고사하고 애인 희서와 아파트를 구매하면서 생긴 대출의 이자는 선우가 손쓸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두 사람의 관계를 짓누르기만 한다. 자본이 모든 일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누군가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가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본인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거나 원가족에게 재정적으로 기댈 수도 없는 선우는 그렇게 모든 감각을 자신이 몸을 누이고 있는 아파트에 집중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선우에게 지독한 악취가 맡아지기 시작한다. 선우는 악취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점차 냄새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일에 빠져들게 된다. 비로소 이 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선우에게 주변의 만류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영화 〈모래〉(2011),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우리는 매일매일〉(2019), 〈애프터 미투〉(2021) 등 여성주의 다큐멘터리를 다수 제작해 온 강유가람 감독의 첫 번째 장편 극영화인 〈럭키, 아파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레즈비언 커플인 선우와 희서가 자신들의 아파트를 구매한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레즈비언 커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다가 이들의 내 집 마련 서사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여성 인물 간의 로맨스에 주목하는 여성애자들과 미래의 주거 안정 및 경제적 자립을 주된 가치로 삼는 (비혼) 여성들의 흥미를 일으킬만한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럭키, 아파트〉가 보여주는 건 이들의 욕망과는 다른 것인데, 선우와 희서가 지금의 주거 환경에 기쁨을 누리는 건 과거의 회상 장면으로 아주 짧게 지나갈 뿐이며, 이후 희서가 아파트를 구매하기 위한 자금 중 일부를 원가족으로부터 빌려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의 자립을 둘러싼 조건과 환상마저 위협받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직업과 가족 관계, 가치관 등 전반에 있어 차이를 지닌 선우와 희서의 관계는 점차 불안정하고 취약해진다. 이처럼 영화는 레즈비언 로맨스를 비롯해 여성의 안정적인 자립을 염원하는 이들의 기대를 비껴가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한다.


그럼에도 내게 〈럭키, 아파트〉는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아있는데, 그건 선우가 부치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문화인류학자 게일 루빈에 의하면 “부치는 여성적인 것보다는 남성적 젠더 약호, 스타일, 정체성에 더 편안한 여성들을 위한 레즈비언 어휘이다.”1) 이때 부치가 레즈비언 집단의 언어로서 다양한 형태의 레즈비언 남성성을 아우른다는 것은 퀴어 이론가 잭 할버스탬이 설명하듯 “‘레즈비언’이라는 용어가 동성 간 욕망이라는 표제 아래 다양한 성적 스타일을 포괄하는 경향이 있듯이 ‘부치’도 모든 레즈비언 남성성을 위한 저장소”로 기능한다는 것을 가리킨다.2) 따라서 선우의 짧은 머리카락과 몸에 달라붙지 않는 옷차림에서 여성의 남성성 혹은 레즈비언 남성성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그를 부치 레즈비언으로 읽어내는 일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 같은 선우의 부치 이미지는 영화에서 선우와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청소년 인물인 은주가 자신의 반 친구와 스타일이 닮은 선우를 보고 그가 레즈비언임을 알아차리는 근거가 된다.


나아가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한채윤은 『부치에 대한 어떤 장광설』(2023)에서 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부치가 머리와 의상 등 겉으로 드러나는 스타일로 정의되는지, 성관계에서의 역할을 말하는 것인지, 특정한 행동 방식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등을 두고 갑론을박은 끝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부치는 눈에 띄는 존재다.”3) 어떤 공통되거나 개별적인 특징을 지녔든지 부치를 수많은 사람 가운데 눈에 띄는 존재로 설명하는 한채윤의 적확한 지적은 〈럭키, 아파트〉의 선우가 부치 레즈비언으로 그려진 까닭과 연결된다. 영화는 이야기의 초반 원인을 알 수 없는 악취를 두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선우가 악취의 근원을 쫓는 데 오랜 시간이 할애될 거라는 관객의 예상과 달리 그 원인이 되는 아랫집 강신임(이하 신임)의 사정을 일찍이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던 악취의 이유가 밝혀진 후에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사건을 만들어 가는 선우의 행동은 결국 아파트 시세만을 염려하는 이웃 주민들과 충돌하게 된다. 이에 선우는 ‘불온한’ 섹슈얼리티를 지닌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등 그의 겉모습과 행동으로 인해 이중으로 눈에 띄는 존재가 되어 조용하던 아파트에 소음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선우가 부치로 재현된다는 사실은 나의 시선을 끈 것 외에도 영화에서 선우와 신임 사이의 중요한 알레고리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앞서 악취를 없애고자 집안 곳곳을 청소하던 선우는 냄새의 근원이 아랫집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점차 그 집에 거주했던 신임의 일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신임의 흔적을 쫓던 선우는 그의 집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발견하는데, 짧은 머리카락에 셔츠와 바지를 입은 신임과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은 현정남의 친밀한 사진은 보는 이에게 1970-80년대 바지씨와 치마씨의 존재를 상기시킨다.4) 강유가람 감독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와의 인터뷰에서 선우가 신임의 이야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신임을 바지씨로 재현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5) 감독이 의도한 것처럼 관객은 선우와 함께 신임의 과거 사진을 발견하게 되면서 선우가 신임의 일에 관여하는 이유가 더 이상 집안의 기분 나쁜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만은 아니게 되었다는 걸 감각한다. 이러한 관객의 해석에 확신을 더하듯 선우는 왜 이렇게 신임의 일에 집착하냐고 자신을 타박하는 희서를 향해 이와 같이 소리친다.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랬어.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랬다고!” 그렇게 선우가 레즈비언이라는 점과 신임이 바지씨로 추측된다는 점은 두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여성의 남성성만큼이나 이들 간의 연결 지점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우가 신임을 자신과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혹은 성소수자로 유추하고 강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더불어 관객이 선우가 신임의 삶에 개입하게 된 까닭을 바지씨와 레즈비언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의 간의 동일시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화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선우가 신임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이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어떤 공통된 경험을 공유해서가 아니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선우가 신임의 정체성을 포함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때에 단지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삶에 발을 들이게 된 것처럼 신임이 경험하는 주변인들로부터의 단절과 소외는 그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만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선우와 신임의 특징은 정체성의 언어가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은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으로 독해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한편, 극 중 선우가 부치처럼 보인다는 건 선우와 희서가 맺고 있는 성적 관계를 비롯해 이를 둘러싼 차별과 억압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럭키, 아파트〉를 레즈비언 영화로 바라보게 만든다. 목덜미와 귓바퀴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머리를 하고 가슴이 두드러지지 않는 윗옷과 바지를 입는 선우는 ‘여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선우는 ‘소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선우가 ‘여자’가 아닌 ‘소년’으로 보인다는 점은 관객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난 레즈비언의 남성성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준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나 혼자만이 느낀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 영화를 보고 난 후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손수현 배우가 부치로 나온다는 사실과 함께 선우가 가진 부치 이미지를 이야기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머리카락이 짧은 여성을 찾아보기 어렵다거나, 레즈비언을 다룬 매체에서 부치에 대한 재현이 부족하다는 식의 어떤 의의에 근거를 둔 발견이 아니었다. 확연히 짧은 머리카락에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곤경을 지나치지 못해 속앓이하는 선우의 모습에서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이는 선우가 '되고' 싶은 동시에 '갖고' 싶은 나의 감정과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6) 그렇게 아파트라는 균질적인 공간에 자연스레 녹아들지 않는 선우라는 부치의 형상은 단순히 보는 경험을 넘어서는 욕망을 부추기는 무언가로 나아간다.




문아영

퀴어영화 연구그룹 구성원. 퀴어영화에 관한 다양한 글을 기획하고 발행한다. 퀴어예술매거진 『them』의 에디터로 퀴어웹툰에 관한 인터뷰와 대담을 기획했다. 사랑하는 동료들과 서울여성독립영화제를 만들고 있으며, 여성영화와 퀴어영화를 관람하고 연구한다.




본 글은 비온뒤무지개재단 2024 이창국퀴어연구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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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일 루빈, 신혜수 외 역, 『일탈: 게일 루빈 선집』, 현실문화, 2015, 469쪽.
2) 잭 할버스탬, 유강은 역,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176쪽.
3) 한채윤의 『부치에 대한 어떤 장광설』은 그의 에세이 『우린 춤추면서 싸우지』의 미수록 원고 미니북으로 한정판으로 공개되었다. 한채윤, 『부치에 대한 어떤 장광설』, 은행나무, 2023, 10-11쪽.
4) 루인과 정희성에 의하면 바지씨와 치마씨는 통상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중에서도 바지를 입고 남성적 젠더 실천을 하는 사람을 바지씨로, 치마를 입고 여성적 젠더 실천을 하는 사람을 치마씨로 일컫는 커뮤니티 내부에서 사용되던 용어이다. 루인과 정희성은 다큐멘터리 〈불온한 당신〉(2017, 이영)의 주인공인 이묵의 생애사 인터뷰를 통해 바지씨의 의미를 분석하는데, 이묵의 바지씨 범주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부치 레즈비언, ftm/트랜스남성으로 수렴할 수 없는 복잡한 층위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루인ㆍ정희성, 「퀴어와 공간의 관계 재구성: 영화 〈불온한 당신〉(이영, 2015)의 바지씨 이묵을 통해 한국이라는 공간의 이성애 규범성과 도시-촌락 이분법 탐문하기」, 『공간과사회』 63권 1호, 한국공간환경학회, 2018.
5) 박주연, 「아파트에도, 성소수자 커플이 살아요: 영화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감독 인터뷰」, 일다, 2024.10.26. (검색일: 2025.5.26.) 〈https://www.ildaro.com/10032〉
6) 이연숙(리타)은 〈주간 문학동네〉에서 〈소년 완결 없음〉이라는 연재를 진행하면서 「소년 (못) 되기」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이 글에서 이연숙(리타)은 소년만화 속 소년 캐릭터에 (탈)동일시를 반복하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요컨대 나는 징 같은 ‘남자애’처럼 ‘되고’ 싶기도 했다. (…) 키르에 이입하면서 나는 징이 ‘되고’ 싶어 하는 동시에 징을 ‘갖고’ 싶어 하는 분열적인 자리, 그러니까 내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내가 ‘소년’과 ‘부치’에게 느끼는 욕망을 가늠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연재 당시 공개되었던 이 글은 현재(2025.6.28) 단행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공개로 전환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