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왜 GL/BL 드라마 강국이 되었나?
2025년 7월 26일
박주연
ⓒ 드라마 〈갭 더 시리즈〉, 눗타퐁 웡카위파이롯, 2022.
2023년 초, 평생 덕질을 해온 덕후가 모처럼 맞이하고 있던 휴식기에 어떤 태국 드라마가 내 삶에 들어왔다. 〈GAP: The Series〉(갭 더 시리즈, 이하 ‘갭더시’, 2022)1)라는 이 드라마는 태국에서 제작ㆍ방영된 ‘GL 드라마’다. Girl’s Love, 그러니까 여자들 간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라는 것이다. 잠시 나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난 퀴어서사를 찾아 온갖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해 온 덕후로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2024)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같은 ‘지독한’ 덕후의 레이더망에 걸렸다는 건 뭔가 있다는 의미다.
사실 내가 처음부터 ‘갭더시’를 덥석 문 건 아니었다. 태국어라는 다소 낯선 언어와 전반적인 드라마의 분위기와 연출 등은 드라마로의 몰입을 방해했지만, 그런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 이 드라마에는 다른 강점이 있었다. 다소 개연성은 떨어져도 로맨스에 최적화된 서사와 주인공 둘의 케미가 환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주인공들은 고난과 역경 앞에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걸 ‘이겨내고’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자고로 퀴어서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우울과 슬픔이 대세였기 때문에 ‘갭더시’ 같은 콘텐츠는 속된 말로 퀴어가 환장할 부분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갭더시’로 태국 드라마에 입문하게 된 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됐다. ‘갭더시’가 1년 내 800만 뷰 이상을 획득하고, ‘갭더시’의 주인공인 프린베키(프린과 베키의 ‘CP’명, Couple의 줄임말)가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휩쓰는 큰 성과를 거두자 태국에서 GL 드라마가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핫한’ 시장이 된 태국 GL/BL
ⓒ 드라마 〈더 시크릿 오브 어스〉, 사라츠와디 웡솜펫, 2024.
‘갭더시’의 성공은 2022-23년이었지만, 사실 태국의 BL 드라마는 이미 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특히 아시아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BL 서사가 서브플롯으로 등장했던 〈Hormones: The Series〉가 2013-15년 방영되며 인기를 얻었고, 2014년 〈Love Sick: The Series〉가 방영되면서 BL 시리즈의 붐을 만들었다. 이후 〈SOTUS: The Series〉(2016)와 〈2gether: The Series〉(2020)까지 흥행하며 태국 BL 드라마는 태국 문화를 대표하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갭더시’의 성공 이후, 〈23.5〉(2024), 〈The Secret of Us〉(2024), 〈Pluto: The Series〉(2024) 등 다수의 GL 드라마가 제작 및 방영되었다. 〈The Secret of Us〉(더 시크릿 오브 어스, 이하 ‘시오어’, 2024)2)의 경우, 태국의 공중파 채널인 CH3에서 직접 기획ㆍ제작ㆍ방영한 첫 GL 드라마로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 ‘시오어’의 주인공을 연기한 링옴(링링와 옴의 CP명)은 현재 태국에서 가장 핫한 CP 중 하나다. 태국에서 최초로 석유 회사인 칼텍스(Caltex)의 여성 브랜드 앰배서더로 선정되고, 디올(Dior)과 협업하는 건 물론 다수의 화장품과 액세서리, 음료, 식품 광고를 비롯해 택시 및 음식 배달 앱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랩(Grab) 광고도 진행 중이다.
당연하게도 콘텐츠 시장 규모 또한 변화했다. BL 시장의 경우, 2019년에만 해도 10억 바트(한화 기준 약 415억 원)에 못 미치는 규모였지만 2025년 현재는 약 49억 바트(한화 기준 약 1,800억 원)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태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의 점유율이 0.7%에서 3.9%로 증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작비도 2015-17년에는 약 200-300만 바트(한화 기준 약 1억 3,000만 원)에 머물렀지만, 최근에는 약 1,500-2,500만 바트(한화 기준 약 10억 원)로 증가했다. 태국 GL/BL 드라마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제작사들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되었다는 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또한 드라마 내 PPL과 브랜드 협업이 늘어나면서 그로 인한 지원도 받게 되었고, 정부 또한 GL/BL 콘텐츠를 소프트파워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제작 지원 및 해외 진출을 장려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4년에 방영된 프린베키의 두 번째 드라마 시리즈 〈The Loyal Pin〉(더 로열 핀)은 태국 상무부와 제작사가 공식 MOU를 맺고 만든 작품이다. 태국에서 GL/BL 드라마와 영화 등의 콘텐츠는 민간산업과 정부가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 주목받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태국 GL/BL의 성공 배경
이쯤 되면 다들 궁금해질 것이다. 태국은 왜, 어쩌다가 이렇게 GL/BL 드라마의 중심이 되었는지. 나 또한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그리고 몇 가지 알게 됐다. 다만 이것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하긴 어렵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한 게 아니라, 덕후 특유의 파고들기 영역의 결과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일단 태국은 (한국의 상황과 달리!!) 불교가 중심인 국가라는 점이다. 태국 불교에서는 어떤 이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금기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 차원에서 성소수자를 대대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금기하지 않고 누군가를 정체성으로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려고 한다(물론 여성과 트랜스젠더가 승려가 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는 점에서 차별이 없는 종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기독교와 이슬람 등 동성애를 죄나 금기로 여기는 종교에 비해 유연하게 판단한다는 것이다. 또한 트랜스젠더나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성별에 대해서도,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태국에서는 트랜스여성 혹은 페미닌한 게이 남성을 지칭하는 건 물론 ‘제3의 성’이라는 개념으로 인식되는 카토이(กะเทย, kathoey)가 한국보다 훨씬 가시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1980-90년대부터 미디어에도 등장했는데, 주로 ‘오락과 풍자’를 위한 역할로 등장했다는 한계가 있다. 1985년 개봉한 영화 〈The Last Song〉은 카토이 배우가 주연을 맡은 최초의 태국영화로, 카토이의 비극적인 삶을 다뤘다. 참고로 이 작품은 태국 퀴어영화의 첫 번째 물결이라 분류되는 영화 중 하나로, 당시 퀴어영화는 비퀴어에게 동정을 받을 수 있는 불행한 이야기, 상실과 우울을 다루는 스토리가 특징이었다. 다만 이런 상황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점차 변화됐다. 2000년 개봉한 영화 〈The Iron Ladies〉는 카토이와 게이 남성으로 구성된 배구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카토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최초의 상업영화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한 퀴어들은 점차 조연에서 주연으로 자리를 이동했고, 그들의 이야기가 반응을 얻기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은 흐름으로 연결된 것이다.
사실 태국 GL/BL 드라마의 전 세계적 인기 비결 중 독보적인 이유는 바로 주인공들의 ‘케미’다. 그리고 이 주인공들을 연기하는 두 명의 배우는 ‘CP’로 묶여 CP 활동을 하게 된다. 이 CP 활동은 팬들을 유입시키는 강력한 도구로 작동한다. CP 활동은 굉장히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예를 들어 ‘시오어’의 주인공은 파라다와 언으로 팬들은 파라다와 언 커플링을 지지하는 걸 넘어서 파라다를 연기한 배우 링링과 언을 연기한 배우 옴의 커플링을 ‘쉬핑’(Shipping)한다. 이들은 커플명 ‘링옴’으로 불리며, 같이 드라마를 찍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방송 출연도 하고 광고나 화보도 찍고 팬미팅도 한다. 마치 케이팝 아이돌 그룹처럼 계속 같이 활동하는 거다. 그 활동은 당연히 팬들의 쉬핑에 활력을 더하고, 이들의 케미가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팬들도 더 늘어나며 이들의 충성심 또한 강화된다. 팬들은 CP 자체 콘텐츠를 만들며 적극적으로 해시태그에 참여해 CP의 인지도를 높이고, 이런 뜨거운 반응은 광고 산업을 끌어들이게 된다. 실제로 링옴을 태국 최초의 여성 홍보대사로 선정한 칼텍스 CMO는 링옴이 가진 열정적인 젊은 여성 팬덤이, 자신들의 사업 홍보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링옴이 등장한 칼텍스 광고는 틱톡에서 3주 만에 1,800만 뷰를 기록했고, 링옴 태국 팬덤은 칼텍스를 방문해 주유하는 사진이나 영상을 SNS에 올리며 홍보를 더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득이 될 수밖에 없는 마케팅이다. 소위 ‘Z세대’, 특히 여성 소비자를 타깃으로 하는 기업이라면 GL/BL 팬덤은 매력적인 곳일 수밖에 없다.
ⓒ Thaiupdates. 2025년 방영 예정인 태국 GL 드라마들을 정리해 놓았다.
이런 GL/BL 드라마의 흥행과 팬덤의 활동에 태국 정부 또한 점점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태국 정부는 2022년 이후, GL/BL 콘텐츠를 국가의 소프트파워 전략의 핵심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도 추진 중이다. 일단 2023년 9월 태국 정부는 ‘국가 소프트파워 전략위원회’를 설립해, 음식과 패션, 게임, 드라마 등 11개 산업을 중심으로 소프트파워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중 드라마 산업은 GL/BL 콘텐츠의 글로벌 인기를 반영하여 핵심 분야로 선정되었다. 위원회는 2024년부터 2025년까지 드라마 제작을 지원하기 위해 약 5억 4,500만 바트(한화 기준 약 210억 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또한 태국 정부는 ‘태국 창의문화진흥청’(THACCA)을 설립해, 산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자 한다. 이곳에서는 위원회의 기능을 일부 이관 받을 예정이다. 태국 정부는 2023년 10월 24일, 도쿄 주재 태국 대사관 홀에서 “Beyond Borders”라는 비즈니스 네트워킹 행사를 열어 태국의 BL 콘텐츠가 일본에 수출할 수 있도록 했으며, 2025년 1월엔 브라질에서 ‘OLÁ BL&GL THAILAND IN BRAZIL’라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태국의 소프트파워 및 성평등 증진을 목표로 했으며, 외교부에서는 “BL·GL 콘텐츠를 문화 외교(cultural diplomacy)와 경제 외교(economic diplomacy), 그리고 소프트파워 확대 전략의 핵심으로 언급”하기도 했다.3) 태국 정부에서 이런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이 산업이 소위 ‘돈이 되는 사업’이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중요한 것은 ‘태국이 LGBTQ+를 포용하는 열린 나라’라는 이미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 ‘선진국’의 지표로 여겨지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태국은 현재 민간 정부가 집권하고 있지만 이전의 군부 정권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그런 군부 중심의 이미지를 지우고, ‘새로워진, 더 나아간’ 태국의 모습을 알리는 데에 GL/BL 콘텐츠의 흥행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문화와 산업, 정치 영역의 복합적인 상황과 욕망이 서로 잘 맞아떨어지면서 태국은 GL/BL 콘텐츠 강국으로 자리 잡았고, 이는 향후 몇 년간은 계속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로 나의 덕질 떡밥이 당분간 떨어질 일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말 행복하다.
그렇다고 해서 태국이 퀴어를 위한 낙원이라는 건 또 아니다. 태국 GL/BL 콘텐츠에도 한계가 있고, CP 활동의 부작용과 팬덤 내 문제 등도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태국 GL/BL 드라마의 부상은 여러 의미에서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은 분명 한국에는 없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와 보셔라. 태국 GL/BL의 세계로.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서 일하고 있고 책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2024)를 썼다. 동일명의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드라마와 영화 속 퀴어서사가 날 살리고 키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덕후. 요즘은 태국 여자들이 내 심장을 뛰게 하고 있다.
본 글은 비온뒤무지개재단 2024 이창국퀴어연구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1) 갭더시는 현재 유튜브 ‘IDOLFACTORY OFFICIAL’ 채널에서 무료로 전편을 감상할 수 있으며, 한글자막도 이용이 가능하다. 갭더시의 영상 중 8화 Part3과 9화 Part2는 5,000만 뷰를 넘기는 등 대단한 기록을 세운 바 있다.
2) 시오어는 현재 유튜브 ‘3Plus’ 채널에서 1-3화까지 무료로 볼 수 있으며, 전편은 제작사이자 방영사인 CH3의 자체 플랫폼(https://ch3plus.com)에서 월정액 결제 후 감상할 수 있다. 시오어의 영상은 영어자막 이용이 가능하지만, 한국에서 여러 경로로 검색을 진행하다 보면 한글자막이 있는 영상을 발견할 수 있다.
3) Ministry of Foreign Affairs, Kingdom of Thailand, 「Summary of Weekly Press Briefing by Director-General of Department of Information/Spokesperson of MFA on Friday 7 February 2025」, Ministry of Foreign Affairs, Kingdom of Thailand, 2025.2.7. (검색일: 2025.6.7.) 〈https://www.mfa.go.th/en/content/weeklypreng?cate=674059168d902f116b4a9a52〉